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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집트의 위대한 문화유산들

by Dreaming Boss 2023.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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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팅에서도 얘기했지만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발원할 수 있었던 결정적 기폭제인 나일강 유역은 매년 주기적인 범람이 일어나 상류의 진흙과 그 속의 자양분들이 하류로 쓸려 내려왔기에 토질이 비옥했다. 다른 문명에 비해 생산량이 매우 높은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평야를 형성했고 이 힘을 바탕으로 다른 문명보다 빠르게 문명의 진화를 이루게 되었다.

현재의 사막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고대 이집트는 사막에 세워졌기에 나무가 매우 귀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말린 진흙 벽돌이나 바위들로 지어졌고 특히 바위를 깎아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몇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대다수의 석재들은 석회암, 화강암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흔히 아부심벨처럼 거대한 암석들을 통짜로 깎고 쌓아 만든 유적들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집트인들은 왕궁 같은 건축물을 지을 때 말린 진흙 벽돌을 많이 사용했고 석재로 만든 신전 외에 왕궁 같은 건축물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사라져갔다.

아부심벨 대신전은 이집트 아스완의 남쪽 280km 지점에 있는 전설적인 파라오 람세스 2세가 건설한 신전이다. 높이 20m의 거대한 4기의 좌상과 암벽을 60m나 파고들어 가서 건설한 신전이다. 이 신전에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모래에 파묻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잊혀 있다가 1813년 스위스 출신의 탐험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발견했으나 아부심벨 대신전의 입구를 찾지 못해 직접 발굴하지 못하고 지인이었던 이탈리아의 탐험가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가 1817년 발굴 이후 그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 아부심벨도 원래 그렇게 불렸던 것이 아니라 최초 발견자인 부르크하르트가 처음 탐험 시 안내단을 이끌었던 이집트인 소년의 이름인 아부 심벨에서 따왔다고 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또한 현재 이집트 1파운드 지폐에 아부심벨 대신전이 인쇄되어 있다. 거대한 좌상의 두꺼운 다리 부분에는 수만은 여행자들이 끄적인 낙서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에 긴 시간 속에 스쳐 가는 작은 존재인 인간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다고 흠짐을 내다니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의 위치 또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집트 정부가 1960년대 나일강 상류에 거대한 댐인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하자 점차 물이 차오르면서 나일강변에 위치했던 아부심벨 신전이 침수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큰 관심이 쏠렸고 물에 잠기는 것만큼은 모두가 막고 싶었던 모양인지 초대형 규모의 문화재 보존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아부심벨 신전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신전 주위에 소규모 방파제를 만든다거나 거대한 돔을 지어 수중에서 보존하는 방안 등 여러 대책들을 논의 됐으나 결국 예산 문제로 암벽을 포함한 신전 전체를 20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덩어리도 나눠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 후 재조립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3600억원의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었으며 신전을 자세히 보면 공사 당시 신전을 잘게 나눈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이집트를 기억나게 하는 것으로는 미라가 있을 것이다. 이집트 문명에서는 사후 세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미라를 만들었고 그 기술이 점점 발달하여 미라 제조 전문가 집단이 별도로 존재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사후 세계로 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미라가 있던 곳으로 돌아와 부활한다고 믿었으며 그럴 때 돌아올 육신이 온전해야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고 믿어서 시신의 방부 처리에 더욱 정성을 기울였다.  

자세한 내용까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미라 제작 시에는 심장을 제외한 내장을 제거하고 시신 안에 다른 물질을 채웠는데 사회 상류층은 송진과 향료를 섞어 넣었고 평민들은 돌덩어리나 톱밥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시신을 탄산나트륨을 이용해 건조하고 아마포로 감은 후 관에 넣는 방식이었다. 이후 훗날에는 미라 제조 기술이 로마 문명권으로 확산하여 관을 쓰지 않고 시신을 오늘날의 붕대라고 할 수 있는 아마포를 감은 뒤 석고 또는 회반죽을 칠해 시신의 윤곽을 드러내도록 굳히고 색칠해 관을 대신하거나 석고를 칠한 뒤 그 위에 일상복이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아마포를 더 감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미라에 집착했던 이유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생각을 뇌로 하는 게 아니라 심장으로 한다고 생각했고 사후 세계에서 오시리스가 선악을 판별하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는 기준으로 심장을 저울에 따라 그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파라오나 귀족의 경우는 제거한 장기를 따로 방부처리를 하여 별도의 용기에 담아서 보관했고 중산층의 경우는 특수한 약물을 시신의 항문에 주입해 내장을 다 녹여서 겉만 남은 시신을 미라로, 최하위층은 단순하게 소금에 절이거나 그냥 건조한 토굴에 안치하여 자연적으로 건조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개나 고양이 같은 오늘날의 애완동물뿐만 아니라 신의 현신으로 여겨졌던 동물들은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별도의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애완동물로서 뿐만 아니라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고양이 미라 같은 경우 한꺼번에 수십 톤씩 발굴되기도 했다. 19세기에 베니하산에서는 20톤의 고양이 미라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는데 영국의 대영 박물관 등에 여러 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이집트 북부에서 한꺼번에 800만 마리의 개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성스럽게 여긴 물고기도 미라로 만들었기에 많이 발견되었을 뿐더러 원숭이, 뱀, 당나귀 등등 이집트 박물관에 가면 여러 종류의 미라가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대부분의 미라로 만든 동물들은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물들은 신전에서 미라와 함께 묻기 위해 키우는 동물들인데, 신전에서 떠받들다시피 키우다가 이들을 합장하기 위해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고가에 팔았다고 한다. 주로 환생의 상징인 개구리, 바스테스의 상징인 고양이, 호루스의 상징인 매, 크놈의 상징인 악어 등을 많이 미라와 함께 묻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죽은 이가 부활했을 때 먹기 위해 미라로 처리해 둔 동물들도 있다. 살아 있는 동물을 미라와 함께 합장했다니 조금은 섬뜩하기도 하지만 2017년 영국의 전국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 동물 미라들을 X선 등으로 조사했더니, 실제 동물이 아니라 동물 모형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 적이 있다고 한다. 현대에 모조품을 만든 게 아니라, 고대 이집트인들이 처음부터 모형 동물 미라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를 연구한 리디야 맥나이트 박사는 두 가지 이유를 추측했는데, 하나는 동물의 사체 자체는 주인과 함께 매장하고 이후 기념품의 용도로 모형 미라를 제작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미라 제작자들이 동물의 미라를 넣는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모형의 동물 미라를 넣어서 돈을 갈취했을 가능성이다. 후자의 경우, 당대 이집트에선 미라가 하나의 산업으로서 많은 미라 제작자가 있었고 그들 중에 사기꾼들이 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타당한 가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몇천년이든 지금 현재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있고 문화와 삶의 모습이 다를 뿐 그 인간 군상의 모습은 같았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와 같은 일들은 충분히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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