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전제해야 할 부분은 이집트는 지극히 종교적인 사회였으며 문화, 예술 활동이 개인의 창의성에 기반하기보다는 파라오, 귀족, 신관의 지시나 이들을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이집트 문화의 근원은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처럼 경전이나 교리가 있는 종교가 아니었다. 지켜야 할 교리나 도덕 준칙이라기보다는 삶 그 자체였다. 고대 이집트의 신은 유일신이 아니었으며 일반적으로 2가지 종류의 신을 믿었는데 하나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신들로 호루스, 아누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머지는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았던 파라오가 죽어서도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경우였다. 당연히 왕족만이 사후에 신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지만 드물게 능력이 뛰어난 경우에 일반인도 신이 될 수 있었다. 바로 우리가 영화 미이라를 통해 알고 있는 임호텝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악역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임호텝은 제3왕조 조세르 왕의 최측근으로 신왕조를 건국하고 안정시켰으며 쿠푸 왕대까지 활약했던 정치적 능력이 탁월한 명재상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최초로 계단식 피라미드를 설계했으며 건축학뿐만 아니라 의학, 천문학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사후에 파라오와 같이 신격화되었고 건축과 공학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위와 같은 신들을 숭배하는 고대 이집트 신관들은 대중들에게 설교하거나 전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딱히 정해진 경전도 없고 신도 다양했으며 지역에 따라 그 믿음도 다양했다고 하니 전도가 불가능했을 법도 하다. 게다가 생활 자체가 종교였던 당시의 이집트 평민들에게 별도의 설교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후 세계가 있고 영원한 삶을 위해 현세에서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속삭임을 전파했을 것이다. 그 대가로 막대한 양의 재산과 토지, 노예를 소유했고 파라오의 자리를 노릴 정도로 그 권력이 막강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신관들은 결혼도 가능했고 자녀도 낳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부와 권력은 세습되었고 대대손손 제사장과 신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파라오, 귀족과 함께 이집트 계급 사회의 꼭대기에서 군림했다.
사실 고대 이집트의 예술품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거대한 피라미드일 것이다.
고대 이집트 건축의 대명사인 피라미드는 살아 있는 신인 파라오의 무덤으로 왕의 권위와 신성성을 나타냈고 워낙 사이즈가 컸기에 보는 사람들마다 경탄했다고 한다. 최신 기술이 난무하는 현대에도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거대 피라미드인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놀라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로마 시대에 이미 피라미드는 유명한 관광 코스였으며 당시에는 피라미드 바로 옆에는 장대한 장례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고 역대 파라오들은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울퉁불퉁한 현재의 모습과 달리 고대에는 피라미드 외벽이 백색 대리석으로 덮여 있어 매끈하게 반질반질해서 아름다웠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피라미디온'이라고 해서 황금으로 도금한 캡 스톤을 얹었다. 다시 말하지만 도금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나 게임을 통해 상식처럼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복잡한 석실과 미로 또는 각종 기관 매복 시설 등은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중앙 통로를 통해 곧바로 관이 있는 묘실로 곧바로 갈 수 있는 굉장히 단순한 구조라고 한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포함해 중앙 통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통로는 놀랍게도 도굴꾼들이 뚫은 것이라고 한다. 이미 피라미드를 지을 당시부터 도굴을 걱정했으며 그래서 가장 중요한 매장 실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통로는 모래나 자갈 등으로 막아 도굴꾼의 침입을 방지했고 매장 이후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아예 거대한 석판으로 통로를 막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거대 피라미드는 도굴꾼들에게 손쉽게 포착될 수 있는 먹잇감이었다. 사방이 뻥 뚫린 곳에 그것도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었으니 도굴꾼에게는 너무나 쉬운 도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피라미드는 수백년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도굴당했다. 후대의 파라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자기 무덤만큼은 절대 도굴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왕가의 계속이라는 곳에 석굴을 파서 그 안에 미라를 안치하는 방법을 사용했고 안에는 미라와 함께 화려한 부장품들이 같이 묻었으며 그 위치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그래도 도굴꾼들을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신왕국 멸망 후 혼란기에 돈이 부족해진 파라오들이 후안무치하게도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을 도굴해 그 안의 부장품들을 꺼내 돈을 마련했다고 하니 멀쩡한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고대 이집트 당연하게도 농업사회였다. 문명 차체가 나일강의 정기적으로 범람한 덕에 생긴 비옥한 땅 위에 생겨났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나일강은 9월에 그 높이가 가장 최고조에 달했고 삼각주 지역이 약 1.5m 정도의 물에 잠겼다고 한다. 10월 이후 물이 빠지면 그동안 쌓인 비옥한 퇴적토가 남았고 이 퇴적물들은 엄청나게 땅을 비옥하게 했으며 천연비료 역할을 한 덕분에 이집트인들은 퇴비를 주지 않아도 많은 수확이 가능했다. 그 덕분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세계 최초로 대규모로 농작물을 재배한 고대 문명 중 하나기도 하다. 주로 재배한 작물은 밀과 보리, 콩류였다. 포토나 수박 같은 과일도 키웠으며 양파, 마늘, 파 같은 작물도 재배했다고 한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파피루스는 야생에서 워낙 많이 자라 쉽게 구할 수 있었기에 별도의 재배를 하지는 않았지만 뿌리는 식용으로 먹고 줄기는 그 유명한 종이를 만들거나 밧줄이나 집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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